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총독부 청사 (문단 편집) === 철거 === ||<:> [youtube(Ea8xP5mAexg)] || || '''[[斬]]![* '''[[참수형]]'''의 참이 이 글자다.] 일제첨탑''' - 철거 당일 [[KBS 뉴스 9]] 헤드라인 문구 || 맨 처음에 해체가 논의된 것은 [[6.25 전쟁]] 중이었던 [[1.4 후퇴]] 이후에 막 서울을 수복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의 상징을 서울의 심장부에 둔다는 것이 말이 되냐면서 철거를 지시하면서였다. 당시 이 계획을 검토한 사람은 육군 공병감 엄홍섭과 육군 참모총장 [[백선엽]]이었는데, 당시 [[공병]]대에서는 "이렇게 막대한 석재를 나를 장비를 도무지 못 구하겠다."라고 난색을 표했고 백선엽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미군]]에게 불도저 4대를 빌려오긴 했는데 중장비는 그게 고작이었고 기껏해야 지게꾼들이나 동원할 수 있었다. 해체할 능력은 아예 없고 폭파라도 시켜서 억지로 없앤다 해도 무거운 석재를 나를 능력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당시는 모든 정부 재정과 수입 물자를 [[미국]] 원조에 의존할 때였다. 운전수는 교육시킨다 해도 불도저도 빌려와야 하고, 트럭도 빌려와야 하고, 기름도 얻어와야 하고, 공구와 작업복도 얻어와야 하고, 삼시세끼 급식도 얻어먹어야 하고. 글자 그대로 한국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게 국민의 맨몸뿐이고 그거 빼고 모든 게 미국 원조이다 보니 사정이 저랬다. 다른 복구 사업을 제쳐두고 인력과 정과 망치와 지게로 [[우공이산]]을 하겠다면 아주 못할 것까진 아니었겠지만, 전후 잿더미가 된 서울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큰 건물이어서 부수는 데 예산 쓰고 정부 청사로 쓸 새 건물을 근처에 짓는 데 예산 써야 하는데 그것도 낭비이니 결국 포기했다. 철거는 미뤄졌지만 쓰기에도 영 찜찜했기 때문에 2공화국 시절까지도 공식 정부 청사로 쓰지 않고 방치했다. 1962년에 재개관된 것도 전적으로 중앙청 건물을 개보수해서 쓰면 비용을 아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후로 1970년대까지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에 대한 논의는 지지부진했다가 1982년 과천으로 정부 기능이 부분 이전하는 김에 이때까지도 정부 청사로 쓰였던 조선총독부 청사도 철거하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박물관으로 쓰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민주화 이후 [[경복궁]] 복원 계획이 확정되면서 다시금 중앙청 건물 철거 논의가 나왔다. 1991년에 [[노태우]] 대통령이 중앙청 철거를 지시했다. 이 때 일본 근대 건축사 연구단체 '메이지 건축 연구회'가 "양국 간에 불행한 역사긴 하지만, 동아시아 근대 건축물 역사상 가치가 높은 건물"이라고 하여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1060400289113004&editNo=4&printCount=1&publishDate=1991-06-04&officeId=00028&pageNo=13&printNo=942&publishType=00010|보존을 촉구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이 사실이 공분을 사 한국의 여론이 악화되는 바람에 철거 찬성 여론이 높아졌다. 그러나 이후 노태우 정부의 비서진이 바뀌면서 철거는 또 다시 유야무야됐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뒤 다시 해체 계획이 입안됐다. 이 해체 결정에도 후술될 많은 국내외적인 논쟁이 일어났으나 결국 해체가 결정됐다. 1995년 3월 1일 오전 10시에 정부는 구 총독부 앞 광장에서 '광복 50주년 3.1절 기념 문화 축제'를 열어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옛 총독부 건물을 헐어낸다고 선포했다. 이날 선포식에서 정양모 국립중앙박물관장은 경과 보고를 통해 "오늘 [[삼일절]]을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의 시발점으로 삼는다."라고 천명했다. 정 관장은 이어 "[[8월 15일]]까지 철거 실측 작업을 마친 뒤 광복절을 기해 총독부 건물 중앙돔의 첨탑을 끊어낸 뒤 내년 초까지 철거를 완료하겠다"고 밝혔다. 거기에 경복궁 복원 계획도 같이 천명했다.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753830|KBS 뉴스9 보도자료]] 드디어 8월 15일 [[광복절]] 오전 9시, 옛 총독부 광장에서 열린 기념식장에서 중앙돔 첨탑 분리에 앞서 [[주돈식]] 문화체육부 장관은 [[광복|해방]] 50년 만에 이뤄지는 일제 상징의 제거를 호국 영령들에게 고하는 고유문을 낭독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일제강점기|우리 민족의 언어와 역사를 말살하고 겨레의 생존까지 박탈했던 식민 정책]]의 본산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여 암울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워 통일과 밝은 미래를 지향하는 정궁 복원 작업과 새 문화 거리 건설을 오늘부터 시작함을 엄숙히 고합니다. 그리고 9시 21분, 커다란 기중기가 첨탑에 구멍을 뚫어 만든 고리에 1인치 굵기의 쇠밧줄 5개를 걸고 서서히 첨탑을 들어올렸다. 첨탑 중에서도 11.4톤짜리 첨탑 윗부분이 먼저 들어올려진 것이다. 첨탑의 일부분이 들어올려지는 순간, [[광복절]] 경축 행사에 모인 5만여 명의 시민들은 일제히 손뼉을 치고 부채를 흔들었고, 그 당시 식민지배를 겪었던 어르신들은 만세를 부르며, 일제 잔재의 청산을 환영했다. 이어 건물 주변에 설치된 수백 발의 폭죽과 불꽃이 하늘로 높이 솟아올랐다. 첨탑이 기중기에 매달려 지상으로 옮겨지는 동안 광화문 앞 경축 행사장에서는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연주하는 <다시 찾은 빛>이 장엄히 울려퍼졌으며 이내 잘려진 첨탑은 15분 만인 9시 35분에 지상으로 완전히 내려졌다. ~~적진을 부쉈다.~~ 이러한 모습을 본 정양모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누가 저 탑이 잘려나가리라 생각했냐." 하며 "이젠 철거–보존을 둘러싸고 갈라진 국론을 새 민족 박물관 건립으로 모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5081600289123001&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5-08-16&officeId=00028&pageNo=23&printNo=2314&publishType=00010|한겨레신문 기사]]) 첨탐 철거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들은 지하 보관소로 옮겼다가 중앙청 바로 옆에 있는 구 국립중앙박물관 사회교육관 건물로 이전되었다.[* 총독부 철거 1년 전부터 '조선왕궁 역사박물관'으로 기획됐으며, [[2005년]]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구]]로 신축 이전하자 원안대로 [[국립고궁박물관]]이 되었다.] 이후 1996년 초부터 차근차근 압쇄 및 줄톱 공법으로 절단, 해체하는 과정을 통해 철거해 나가 그해 말인 11월 13일 마지막 벽면을 끝으로 철거가 완료되었다. 한편 잘린 첨탑은 1995년 8월 말까지 구 총독부 앞마당에서 일반에게 공개되었다가 이후 독립기념관으로 옮겨졌다. '''이로써 70년간 [[경복궁]] 뒷편을 가로막고 있던 건물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 [[파일:attachment/capital_hall_destroyed.jpg|width=100%]] || 순수 건물 철거비로 당시 약 47억 원이 소요되었으며, 중앙청 건물의 실측 및 영상 자료, 모형 제작을 합쳐 총 117억 원이 소요되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논쟁에 빠져 잊는 것이지만, 관련 비용에서 가장 컸던 것은 [[국립중앙박물관]] 신축 비용이다. 1990년대 초에는 대략 1천억대로 예상되었다고 하며, 지금의 건물은 2005년에 개관했는데 4,100억 원이 들어갔다. 한편 검토되었던 [[독립기념관]] 부지로 해체 이전하는 방안에서도 500억 원에 가까운 많은 비용이 소요되리라 추산했다. 조선총독부 철거는 국내의 건설 기술력의 발달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남산외인아파트|남산 외인아파트]]와 [[라이프주택개발|여의도 라이프빌딩]]이 폭파를 통해 짧은 시간에 편하게 철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면, 조선총독부는 다이아몬드 와이어쏘 머신 및 굴삭기에 장착된 크라샤를 사용함으로써 주변에 소음, 진동 등의 피해를 주지 않고 철거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는 주택 등을 철거할 때도 [[착암기|브레이커]]를 사용했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는 크러셔를 많이 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